2017.01.29 18:15

탈출일기(脫出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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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이천십육년 팔월이십이일.

 

아비규환이다. 지옥이 따로 없다. 어둠을 찢는 비명 소리에 눈을 뜬지 10. 믿을 수 없는 광경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람들이 미쳐가고 있다.

겁에 질린 딸과 아내를 두고 집 밖으로 나왔을 때 거리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새벽4시였다. 폭주족들인가. 광복절만 되면 굉음을 내며 달리는, 자유를 좇는 영혼들이라나.

위험한 공기가 느껴졌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문을 꼭꼭 잠갔다. 아내가 딸을 안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나는 폭주족들인 것 같다고 하며 다시 문과 창문들을 점검했다. 숨을 죽이고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날까 신경을 집중했다.

쾅쾅

누군가가 문을 세게 쳐댔다. 딸이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아내에게 손짓으로 몸을 낮추라 하고, 조심스럽게 밖을 내다보았다.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자동센서로 켜진 조명 덕분에 그들의 모습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맙소사.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들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심지어 한 여자는 피가 뚝뚝 흐르는, 다른 사람의 팔 한 짝을 손에 쥐고 있었다.

쾅쾅쾅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문은 위태롭게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나는 아내에게서 울먹이는 딸을 빼앗듯 안고 조용히 아내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쾅쾅 쾅쾅쾅

문의 경첩이 흔들거렸다. 부엌에서 차고로 나 있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어둠 속에서 초록색 마티즈가 윤곽을 드러냈다. 다행히 차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도 잠시, 차 열쇠가 거실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딸을 다시 아내에게 안겨주고, 황급히 거실로 뛰어 들어갔다.

거실의 탁자에 놓여있는 차 열쇠를 발견함과 동시에, 위태하던 현관문이 부서졌다. 피범벅이 된 사람들이 나를 발견하고 물밀듯이 달려들었다. 재빠르게 열쇠를 낚아채고 부엌으로 몸을 날렸지만, 이대로라면 차에 타고 시동을 걸 시간이 없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는 아내가 있는 차고로 차 열쇠를 집어던지고, 친정으로 가라는 고함과 함께 차고로 나 있는 문을 닫았다. 아내의 당장이라도 실신할 것 같은 울음소리가 문을 쳐댔다. 나는 문고리를 잡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빨리 도망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 사이 피투성이의 사람들은 어느새 코앞에까지 와 있었다. 가까이서보니 어디인가 낯이 익다. 바로 동네 슈퍼마켓 주인이었다. 평소 퇴근길에 담배 한 갑 사느라 거의 매일 들렀던 곳이니만큼 확실했다. 다만 그 인심 좋아 보이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것만 제외하면. 그는 괴성을 지르며 나에게로 달려들었다. 나는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을 내밀어 방어해보지만 역부족이었다. 바닥에 그대로 넘어지면서 시야가 흐려졌다. 다행스럽게도, 마티즈의 시동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2. 이천십육년 팔월이십삼일

 

눈을 떴다. 어두웠다. 축축한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보았다. 특별히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목이 말랐다. 어둠 속에서 차츰 부엌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행히도 평소와 다름없는 힘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처참하게 뜯겨진 차고 문이 눈에 들어왔다. 극심한 공포가 밀려왔다. 아내와 딸의 비명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냉장고를 열어 냉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갈증이 해소되자 공포감도 한결 누그러들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해야할 때였다. 피투성이의 사람들, 나에게 덤벼든 슈퍼마켓 주인. 특별히 원한을 살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특히나 어느 여자가 들고 있던 주인 모를 팔 한쪽을 보건대, 찢어죽일 만큼의 잘못을 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사람들은 정상이 아니었다. 다들 단체로 미친 것일까. 혹시 단체로 광우병이란 것에 걸린 것일지도 몰랐다. 언젠가 저녁 식탁에 올라온 소불고기가 떠올라 속이 매슥거렸다.

아내와 딸이 걱정되었다. 소파 한 구석에 쳐 박혀 있는 휴대전화기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지 않았다. ‘지지직-’ 하는 괴 소음만이 들릴 뿐이었다. 두려움이 밀려왔다. 빨리 이곳을 떠야할 것 같았다. 언제 또 그들이 들이닥칠지 몰랐다.

거리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순간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들이 모두 꿈으로 느껴질 만큼 평소 때와 같아 보였다. 다시금 목이 말라 왔다. 집 안으로 도로 들어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충동을 눌러야만 했다. 집 앞으로 나 있는 도로를 따라 택시 한 대가 나를 향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을 숨겨야 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는 순간에 택시는 점점 속도를 늦추었고, 마침내 나의 코앞에 정지했다. 혹시나 운전자가 튀어나와 공격하지는 않을까 잔뜩 긴장했지만, 택시는 주차된 채로 가만히 있었다. 용기를 내어 선탠이 짙게 된 창문으로 얼굴을 들이대려는 찰나, 창문이 조금 열리더니 안에서 빨리 타세요.’ 라는 조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잠시 주저했지만 곧바로 택시의 조수석에 올라탔다. 저 멀리서 인간의 형체를 한 무리들이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김 인환이라고 소개한 택시기사는 다행히도 피를 묻히고 있지는 않았다. 그것은 곧 그가 멀쩡한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 역시 나와 같은 인간이었다. 지난밤의 끔찍한 일을 겪었고, 그 이유도 모르며, 지금은 무작정 이 도시를 떠나려는 중이라고 했다. 차를 타고 30분여간을 달리는 동안, 자신을 보고 맹목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멀쩡한 인간은 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도시 전체가 이미 지옥으로 변했다고 몸서리쳤다. 나 역시 끔찍한 그의 얘기에 몸서리를 쳤고, 여전히 목은 말랐으며, 아내와 딸이 걱정되었고,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나마 이 택시를 얻어 탈 수 있었던 것이 운이었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일단 이대로 이 지옥 같은 도시를 벗어나면 바로 아내의 친정집으로 갈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3. 이천십육년 팔월이십사일

 

저 멀리서 도시와 도시의 경계선을 알리는 고속도로 톨게이트가 보였다. 우리는 말없이 한참을 달려왔다. 무엇이 문제인지 라디오에서는 전화기와 마찬가지로 지지직-’ 하는 소음만이 들려왔고, 나는 이제 입 안이 바짝바짝 갈리질 만큼 갈증을 느꼈으며, 배도 고팠다. 어서 빨리 아내와 딸을 보고 싶었고, 시원하게 톨게이트를 향해 달리는 택시에 한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쉬익- .’

지옥 같은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찰나, 어디에선가 총알이 날아오더니 -아니 유리창에 작은 구멍이 하나 나더니- 택시기사가 피를 뿜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운전대가 멋대로 춤추었고 따라서 차체도 심하게 요동쳤다. 나는 뜻밖에 상황에 당황했지만 애써 침착하려 애쓰며 운전대를 잡았다.

쉬익- .’

또 하나의 총알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가까스로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잔뜩 숙이고 사이드미러를 보니, 톨게이트 외벽 뒤로 경찰제복을 입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총을 이리로 겨누고 있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택시기사의 몸을 비집고, 있는 힘껏 페달을 밟았다. 경찰차 몇 대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좇아왔다. 불편한 자세를 고치기 위해 시체가 된 택시기사의 몸을 억지로 조수석으로 밀어내었다. 페달을 밟고, 운전대를 잡으면서 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일이었고, 때문에 그의 피가 온 얼굴에 튀었고 심지어 입 안에까지 들어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비린내 나는 피가 혀에 닿자, 바짝바짝 마르던 갈증이 조금은 해소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억지로 운전석에 자리를 잡은 나는, 최대한의 속도로 고속도로 위를 달려 나갔다.

 

4. 이천십육년 팔월이십오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차 안에는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고, 차체도 심하게 망가져 있었다. 이유도 모른 체 따라붙는 경찰차들을 따돌리느라 몇 번이나 급정거를 하고, 길이 아닌 곳으로 달린 탓이었다. 몹시도 배가 고팠다. 목도 말랐다. 심지어 처음 택시기사의 피가 혀에 닿았을 때의 느낌이 달콤함으로 변질되려는 정도였다. 빨리 아내와 딸을 만나야만 했다. 마실 것과 먹을 것이 필요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내의 친정까지 갈 만큼의 기름은 남아 있었다. 가는 도중 경찰들이나, 그 미친 사람들만 만나지 않는다면 어찌어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내 저 멀리 아내의 친정집에 보였다. 붉은 빛이 감도는 2층짜리 벽돌집. 다행히 이 부근에는 별다른 일이 없는 것 같아보였다. 아내와 딸은 반드시 저 집안에 안전하게 있을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딩동, 딩동

이제 더 이상 서 있을 힘도 없었다. 갈증으로 목이 타 들어갈 것만 같았다. 남은 힘을 다해 간신히 벨을 눌렀고, 쿵쾅쿵쾅 발 구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문이 열렸다. 빠끔히 열린 문 사이로 반가움과 두려움이 섞인 아내의 얼굴이 보였다.

기다릴 시간도 없었다.

목이 너무 말랐다.

배가 너무나도 고팠다.

마실 것과 먹을 것이 필요했다.

신선한 마실 것과 먹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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