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21 15:14

연애일기(戀愛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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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외래병동은 숨 막히는 정적을 안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두근거리는 설렘을 간직한 곳이다. 이곳은 마치 올림픽에서 결승전을 앞둔 선수들의 대기실처럼, 두근거리는 적막감에 휩싸인 공간이다. 나는 하늘색의 길게 뻗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맞은편의 진료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겨울의 콘크리트 건물 복도는 제법 찼지만 얼굴의 절반을 감싸고 있는 머플러 때문에 땀이 난다. 폭신폭신한 밑바닥의 슬리퍼가 끌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문이 빠끔히 열린다.

정 지연님 들어오세요.”

싹싹한, 노련해 보이는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슴이 더욱 두근거린다.

 

진료실은 훈훈하고 안락했다. 난방이 잘 되어있어서 따뜻하기도 했지만, 그에 어울리는 오렌지색 카디건 차림의 의사가 분위기를 한결 더 안락하게 만들어주는 듯 했다. 나는 너무 더워서 더 이상 머플러를 하고 있을 수가 없다. 사실, 이제 하고 있을 이유도 없지만, 여전히 두렵기만 했다. 나의 얼굴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 지연 씨. 안녕하세요. 앉으세요.”

나는 조심스럽게 머플러를 벗으면서, 의사의 표정을 살피면서 의자에 앉는다. 다행히도 의사의 표정에는 동요가 없다. 나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을 뿐이다. 이제 익숙해진 것일까. , 그렇다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떻게 지내셨나요? 얼굴이 조금 좋아지신 것 같은데요?”

이런, 의사는 내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얼굴에 분명 홍조(紅潮)가 띄어졌음을 생각하고,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잘 지냈어요……. 정말로......”

모기만한 소리로 겨우 대답을 했지만 진정 이것은 진실이었다. 끼니때마다 돼지고기를 꼭꼭 챙겨먹은 탓일까. 요즘은 사람을 보아도 물고 싶은 욕구가 전보다 적게 들었다. 심지어 어제는 자신감에 넘친 나머지 다니던 학교에 가보기도 했었다. 캠퍼스 근처에 가자마자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식욕에 그만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지만…….

그리고 얼굴. 그 날 이후로, 그러니깐 몸과 얼굴이 변하기 시작한 이후로 거울을 한 번도 보지는 않았지만 의사는 분명 얼굴이 좋아진 것이라고 했다. 의사는 거짓말을 절대 하지 않으니깐. 그렇다면 어쩌면, 진짜 좋아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가슴이 쿵쿵하고 뛴다.

좋아요. 점점 나아지고 있어요. , 식사는 어때요. 줄이고 있나요?”

돼지고기를 말하는 것이다.

아니요…….”

아쉽지만 아직 이 끔찍한 식욕만큼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야들야들한 껍데기, 부드러운 속살, 적당히 섞인 입에 착착 감기는 비계까지. 사람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돼지고기만큼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어떻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나는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한다. 확실히 돼지고기를 챙겨먹어만 주면 엄마를 공격하고 싶은 생각은 안 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두려웠다. 처음 엄마의 목을 물어뜯었던 그 순간, 입 안 가득 퍼지던 신선한 육즙의 맛은 도저히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기대했던 대답이 도무지 나오지 않자 의사의 이마에 주름이 생긴다. 나는 가슴이 철렁한다. 거짓말이라도 했었어야했는데 하는 후회감이 든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뮌하우젠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동학대 때문이라 말입니다. 그러니깐,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아니에요. 그건.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될 질문을 해준 의사가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저는 엄마를 사랑해요. 물론 엄마도 저를 사랑하고요. 이건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자신의 목을 물어뜯은 나를 감싸주고 이렇게 직접 병원에도 데리고 가준 것이 엄마가 아닌가.

의사는 나의 눈을 빤히 쳐다본다. 이런 적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나는 어딘가로 숨어버리고만 싶다.

 

이 사람은 정말이지 의사를 하기엔 너무 아까워. 나는 항상 의사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영화배우나 연기자, 노래를 잘한다면 가수도 괜찮지.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에 눈썹도 짙고, 무엇보다 저 입술. 부끄럽지만 나는 그의 입술이 매우 섹시하다고 생각했다.

아동학대가 아니라면 과대망상, 대인기피증, 공포증, 아니면 우울증이라든가, 조증이라든가…….”

의사의 입술은 끊임없이 나를 유혹한다. 저 입술에서는 무슨 향기가 날까. 프로작(Prozac)에서 나는 박하향기일까. 나는 가만가만히 그의 입술에 다가간다. 유두가 뻣뻣해지는 느낌이 든다. 로즈마리 향인가, 아니 라벤더인가. 아무튼 꽃향기임에는 틀림이 없다. 나는 용기를 내어 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의 맑고 검은 눈동자가 커진다. 미안해요. 하지만 부디 놀라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향기를 알고 싶을 뿐이에요. 그 뿐이에요. 그의 입술과 나의 코 사이의 거리는 이제 10cm를 지나 5cm, 1cm…….

, 나는 소스라치며 그에게서 떨어진다. 이럴 수가. 나는 절망한다.

지연 씨 듣고 있어요?”

의사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본다. 나는 절망감에 빠져 주저앉는다.

아무래도 몸이 안 좋아 보이네요. 오늘은 그만 해야겠어요.”

그래요. 이제 그만해요. 당신을 위해서라도. 나의 눈에 눈물이 핑 돈다. 그에게선 분명히 그 냄새가 났다. 엄마의 목을 물어뜯기 전에 맡았던 냄새.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식욕을 불러일으킨 그 냄새가 말이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난다. 다리에 힘이 빠져서 조금 비틀거린다. 의사가 나를 부축해주려고 다가온다.

오지 말아요! 괜찮아요.”

날카로운 나의 외침에 의사는 놀란 모양이다. 미안해요. 놀라게 할 마음은 없었는데.

머플러로 얼굴을 꽁꽁 동여맨다. 작은 틈새로 의사의 얼굴이 보인다. 여전히 놀란, 그러나 걱정스러운 얼굴이다.

나는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정말로.

조심히 가세요. 약 잘 챙겨 드시고요. 다음에는 꼭 건강한 모습으로 봐요.”

진료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등 뒤로 의사가 외치듯 말한다.

 

얼굴을 꽁꽁 동여맨 머플러가 눈물에 젖어 축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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